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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화 영동스낵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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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화

<풍문으로 들었소, 영동스낵카>



학창시절 나의 집에서부터 학교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 1km가 좀 넘었다. 종종걸음으로 걸으면 30분 정도 걸렸었고, 같은 방향에 사는 친구들과 함께 군것질하고 계단에서 가위바위보도 하고 하면 1시간 정도 걸렸다. 가끔 퐁퐁이라고 불렀던 트램펄린 아저씨가 오거나, 학교 근처에서 설탕을 연탄 불에 녹이는 냄새가 나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달고나 경력 3년의 실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하는 말을 실감하고 있는 지금. 반대로 다시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은 가장 시간이 느리게 가던 때였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고도 어디를 그렇게 쏘다녔는지... 지금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몰려오니까 말이다..^^;;


하굣길에는 이렇게 재미있었던 반면에, 등굣길은 항상 졸려워서 퉁퉁 부은 눈으로 버스를 타고 다녔다. 지금이야 버스카드가 활성화되어 있지만 그때는 종이로 된 학생용 회수권을 냈다. (10장이 인쇄된 회수권을 약간 모자라게 잘라서 11장을 만들어 쓰곤 했던 찌질한 기억이...) 학교까지는 몇 정거장 걸리지 않았는데, 나는 흔들리는 공간에서 무언가에 집중하면 어지러움이 심해서 주로 창밖을 보면서 가곤 했다. 매일 보는 똑같은 바깥 풍경이지만, 그래도 버스 창밖이 좋았다. 낡고 정감 있는 건물들과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들. 또 가끔 버스가 옆 차를 한대 한대 지나칠 때마다 ‘다음 나올 차의 번호판에는 8이 들어있을까, 없을까’를 혼자 생각하면서 나만의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답답한 지하철보다는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버스를 선호하는 편이기도 하다.


그 당시 버스의 일생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80~90년대만 해도 운전석 부분을 주방으로 개조해서 우동이나 김밥을 팔고, 밤에는 포장마차 역할을 하던 스낵카가 꽤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스낵카를 발견하면 들어가 라면을 사 먹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최근엔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아직 반짝반짝한 버스와 함께 추억의 식사를 대접하는 곳이 남아있다. 바로 ‘영동스낵카’다.





강남 대치동 한복판 그야말로 금싸라기 땅에 떡하니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영동스낵카. 뒤로 보이는 롯데백화점이 ‘그랜드’백화점일 때부터 이 자리를 지켜왔다. 주차장이 굉장히 넓은 데다 택시들로 빼곡해서, 언뜻 보면 택시 차고지에 딸린 작은 매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전 10시 즈음에 방문을 했는데, 직장인들의 출근을 돕고 늦은 아침을 먹으러 온 택시들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 이곳은 365일 24시간 쉬지 않고 운영하는데, 쉬는 날이 없는 기사님들을 위한 배려다. 바꿔줄 잔돈을 미리미리 준비해두고, 워셔액을 저렴하게 팔거나 빈 통을 버리는 공간도 마련하는 등 가게 곳곳에 기사님들을 위한 배려가 깃들어있다.



ㅣ백화점과 영동스낵카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풍경




ㅣ응답하라 1994에 등장하는 한 장면 같은.




ㅣ이른 오전에는 한산하다가도..




ㅣ출근시간을 막 넘긴 후에는 이렇게 택시들로 금세 빼곡해진다.




ㅣ식후에 필수인 커피와 음료수. 봉봉이 눈에 띈다.




ㅣ대부분 1인이 식사를 하기 때문에 모두 TV 쪽을 향해 앉는다.





가게 앞에는 이곳의 상징인 스낵카가 있다. 창문에는 햇빛을 가려주기 위한 귀여운 차양을 달고 반짝반짝 윤을 내고 있는 스낵카. 지금은 오랜 세월이 묻어 촌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지만, 구입 당시인 85년에는 아시아 자동차의 최신 모델이었다. 식당 외부에 있는 이 스낵카가 신기해서 둘러보니 처음엔 그저 장식용(?)인 줄 알았는데, 이 안에서도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다. 주말과 휴일에는 열지 않고, 평일도 기사님이 몰리는 10시 이후부터 영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이 스낵카의 사연은 약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낵카 장사는 여의도에서 처음 시작했다. 7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여의도의 개발이 막 시작되면서, 일하는 사람은 많은데 음식을 먹을 곳은 부족했던 때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원호대상자에게 이동형 분식점을 허가해서 공사장 인근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좁은 공간에서 햄버거와 김밥 등을 팔며 하루 종일 노동하는 것이 매우 고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70년대 중반 즈음 강남의 개발이 시작되면서 강남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폐차 직전의 버스를 임의로 구조 변경을 해서 쓰고 있었는데, 86년 아시안게임을 목전에 두고 정부에서 제의가 왔다.


“서울시가 보증을 해줄 테니 깨끗한 진짜 스낵카에서 장사를 하세요!”


이에 서울시의 도움으로 광주에 있던 아시아 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 스낵카 주문 제작 의뢰를 했다. 미국과 일본 등에서 스낵카 설비 도면을 참고하고, 화장실 등 위생적인 부분을 신경 썼다. 13대의 진짜 스낵카가 탄생했다.


각각의 스낵카들은 서울을 유랑하며 곳곳에서 자유롭게 장사를 하다가, 전국체전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정부의 부름에 따라 해당 지역으로 달려갔다.


“지금이야 야구장이나 체육관에 먹을 곳이 많이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먹는 것이 가장 문제였어요. 그래서 그런 특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우리 스낵카가 있었고요.”


사장님의 인생이 스며있는 스낵카는 출시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새것처럼 반질반질하다. 녹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종종 왁스 칠을 해가면서 관리한다고. 총 운행 거리가 1000km 남짓으로, 아직도 엔진과 부품들은 새것과 마찬가지라고 자식 자랑하듯(?) 말하는 사장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ㅣ반질반질한 스낵카




ㅣ들어가는 입구. 평일 손님이 많은 시간대에 한시적으로 운영한다.




ㅣ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청결한 내부




ㅣ버스 바퀴가 있던 부분에 놓인 의자가 귀엽다.




ㅣ겨울철이나 비가 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며 먹는 우동맛은 먹어본 사람만 안다.





스낵카 구경을 뒤로하고, 식당 내부로 들어섰다. 사람이 없는 빈자리에 앉았다가 다들 나를 쳐다보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살펴보니, 내 머리 위에 TV가 있었다. 혼자 오는 기사님들이 대부분인데 다들 TV를 보면서 식사를 한다. 때문에 TV 밑 자리에 앉으면 계속 아이컨택(?)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나 홀로 1인 식당을 방문했을 때는 스마트폰을 쳐다보면서 식사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다들 TV를 보면서 식사를 하니 외려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한 나는 메뉴를 고르느라 우물쭈물 대고 있었는데, 기사님들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옴과 동시에 메뉴를 말한다. 마치 ‘이리 오너라~’하는 목소리로. 그리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셀프 반찬바에서 반찬을 담는다. 반찬은 매일매일 달라진다고. 반찬을 접시에 담아 자기 자리로 가져오는 찰나에 메뉴가 나온다. 패스트푸드점 뺨치는 속도다. 주방은 척 봐도 4명 이상의 이모님이 계셨고, 서빙하는 속도도 빠르다. 택시 기사는 ‘시간이 곧 돈’이니 지체할 틈이 없다.


메뉴는 단출하지만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아침과 점심엔 먹기 간단하고 더부룩하지 않은 오뎅밥이 잘 나가고, 저녁때는 북어찜이나 불백류가 인기라고. (오뎅밥이라는 메뉴명이 다소 어색해서 여쭤봤더니 오뎅국과 밥을 뜻하는 것이었다^^;)




ㅣ영동스낵카의 메뉴판




ㅣ셀프 반찬바




ㅣ김치찌개와 반찬들. 기사식당답게 1인 식판에 음식이 나온다.




ㅣ보글보글~ 막 끓여낸 김치찌개




ㅣ고기와 두부, 떡 등이 들어있다.




ㅣ또 다른 인기메뉴 돼지불백




ㅣ양념에 진한 마늘맛이 배어있다. 당면사리도 있어서 심심하지 않다.





이곳이 택시 기사님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 넓은 주차장과 저렴한 가격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기사식당을 운영하면서 쌓인 믿음 때문이다. 기사님과 종업원들은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한 가족처럼 친근했다. 많은 메뉴의 사진을 담고 싶어서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촬영했더니, 메뉴의 주인이 대뜸 묻는다.


“아이참, 빨리 주세요~”

“미안합니다 사장님. 오늘 손님이 와서 사진 찍느라요.”

“사진? 사진 찍은 밥이라 더 맛있으려나, 허허.”




ㅣ북어와 무 한조각을 올려주는 북어찜




ㅣ계란말이가 귀엽게 올라가 있는 볶음밥




ㅣ바쁜 시간 슥슥 비벼 먹으면 든든한 비빔밥




ㅣ스낵카의 트레이드마크. 오뎅우동




ㅣ6500원으로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콩비지.




ㅣ익숙한 맛의 짜장밥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밖에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면서 쉬고 계시던 한 기사님을 만났다. 기사님은 이곳을 찾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단번에 대답했다.


“강남은 땅값이 비싸서 그런지, 괜찮았던 기사식당은 거의 없어지고 몇 곳 남지 않았어요. 주차장 넓고, 밥값이 싸니까 습관처럼 찾게 되는 거지. 여기는 언제 와도 허탕 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요. 이런 곳이 아직 남아 있다는게 다행이에요.”


이제까지 찾았던 기사식당과는 달리 손님 중 99%가 기사님들로 채워졌던 영동스낵카. 강남 한복판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맛볼 수 있는 음식이기에 화려한 모양새를 뽐내거나 고급스러운 음식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낵카에서 먹는 밥 한 끼는 값비싼 음식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소박한 정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


식신의 TIP


•주소: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765-3

•메뉴: 오뎅밥 4,500원, 돼지불백 5,500원, 북어찜 6,000원, 우동 3,500원

•영업시간: 24시간. 연중무휴

•밥추가: 무료

•자판기커피: 무료 아님(자판기)

•주차공간: 약 40여대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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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430162015.04.03 (금요일) 오후 05:51

    어릴 적 스낵카에서 우동 먹었던 추억이 새록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