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모란봉 아래에 자리한 을밀대(乙密臺) 정자는 오랜 세월 많은 이야기 속에 등장해온 평양의 명승지다. 한겨울 대동강이 꽁꽁 얼던 시절, 을밀대 정자에 올라 한 그릇 말아먹던 동치미 메밀국수의 맛은 어떤 향기였을까. 그 정취는 전설처럼 아득하지만, 서울 마포 한켠에 그 이름을 건 평양냉면집 ‘을밀대’가 반세기 넘도록 옛 맛을 이어오고 있다. 담담하고도 깊이 있는 한 그릇 냉면에는 북녘 고향을 그리워하던 실향민들의 그리움마저 녹아 있어, 맛을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얼음처럼 시리고 또 아련해진다.
계승되는 평양냉면 맛의 계보

한국전쟁 전후 피란민들을 통해 이북의 맛은 남한 곳곳에 전파되었다. 특히 1951년 1·4 후퇴 무렵 평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많은 사람들이 정착지에서 냉면집을 차렸고, 각지에서 문을 연 냉면집들은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에게는 향수를, 남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별미를 선사하며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평양냉면을 찾는 미식가들은 흔히 각 냉면집들의 족보, 즉 계보를 이야기하곤 한다. 현존하는 서울의 평양냉면 노포들은 대부분 북한 출신 주인장이 내려와 시작한 가게들로, 그 뿌리를 따져 올라가면 몇 갈래 큰 줄기로 나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한민국 평양냉면 계보는 크게 ‘의정부’ 계열과 ‘장충동’ 계열, ‘우래옥’, ‘을밀대’와 같은 명가들이 있다. 의정부 계열은 ‘의정부 평양면옥’을 시작으로 ‘필동면옥’, ‘을지면옥’, ‘의정부 평양면옥 신사점’ 등이 있다. 살짝 뿌려져 나오는 고춧가루로 쉽게 구분할 수 있는데, 유리처럼 맑고 청명한 육수는 예상과 달리 짭짤하게 간이 되어 있어 은근한 감칠맛을 남긴다. 장충동 계열은 ‘장충동 평양면옥’을 시작으로 논현, 도곡, 분당 등에 분점이 있으며 가장 슴슴하면서도 담백한 맛의 육수로 면발의 곡향을 잘 느낄 수 있다. 그 슴슴함 때문에 평양냉면 초심자보다는 고수의 냉면집으로 으레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메밀면의 담백함을 살린다는 큰 틀은 같아서, 두 계열 모두 정통 평양냉면의 맥을 잇는 집성촌으로 평가받는다. 이 두 계파 외에도 서울에는 몇몇 독자적인 평양냉면 명가들이 존재한다. 을지로4가에 위치한 우래옥은 1946년 개업해 70년이 넘는 전통을 이어오는 서울 최고(最古)의 평양냉면집 중 하나다. 이 집의 냉면은 진한 육향과 함께 메밀 면발의 탄력으로 유명하여, 해방 후 서울에 평양냉면 문화를 뿌리내린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오늘 소개하는 을밀대는 평양 출신의 고(故) 김인주 옹이 서울에 정착해 연 집으로, 평양 모란봉 자락의 정자 이름을 따서 간판을 지었을 만큼 평양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다. 살얼음 동동 뜨는 시원한 육수가 특징인 을밀대 냉면은 “서울 3대 평양냉면”으로 손꼽힐 정도로 명성이 높았고, 지금까지도 줄을 서서 먹는 맛집으로 이름이 자자하다.
시대에 따라 약간의 유행과 변화는 있어도, 결국 평양냉면의 본령은 담백한 육수와 메밀면이라는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공통의 철학이 있기에 ‘평양냉면 족보’에 이름을 올린 가게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함께 전통의 가치를 이어가는 동반자들로 여겨진다. 이런 평양냉면의 철학에 매료된 이들은, 바로 전국의 냉면집을 순례하듯 찾아다닌다. 각 집의 육수 온도, 면발의 굵기, 고명 배치까지 세심하게 비교하고 기록한다. 평양냉면 한 그릇을 앞에 두고 펼쳐지는 이들의 탐구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 전통과 정체성에 대한 존중이 깃든 여정이다.
‘반세기 지켜온 옛맛’ 마포 을밀대

평양냉면 성지 탐방에서 빠질 수 없는 을밀대 평양냉면은 그 이름처럼 평양 모란봉 을밀대의 옛 추억을 잇고자 세워진 노포(老鋪)다. 1936년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난 김인주 옹은 해방 이전 일찍이 가족과 함께 남하한 실향민이었다. 그는 18세에 대구의 ‘원산면옥’에 취직해 냉면 기술을 배우고, 1971년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자신의 첫 냉면집을 열었다. 식당 이름을 평양의 유명 누각인 을밀대에서 따온 것은 고향의 정취를 잃지 않고 계승하겠다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1976년 현재 자리인 마포 염리동 주택가로 옮겨와 작은 가정집을 개조한 형태로 다시 시작한 이후, 줄곧 이곳을 지키며 한결같은 냉면 맛을 이어오고 있다. 을밀대의 건물은 원래 여러 개의 방을 품은 옛 주택을 활용한 터라, 실내에 들어서면 마치 미로처럼 구석구석 작은 방들이 이어지는 독특한 구조다. 정겨운 다방 탁자 같은 테이블이 놓인 방마다 손님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면발을 즐기는 모습이 독특하다. 이 식당의 외관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큼직한 한자 간판 ‘乙密臺’에서는 오래된 것만이 풍기는 위풍당당한 멋마저 느껴진다. 1970년대 창업 당시만 해도 장사가 쉽지 않았지만 고집스럽게 옛 방식을 지켜냈고, 그 정성과 내공이 차츰 입소문을 타면서 을밀대는 마포를 넘어 서울 서북부 지역을 대표하는 평양냉면 명가로 자리매김했다. 한여름 불볕더위에도 50미터 넘는 줄이 늘어서 꼭 한 그릇 맛보고 마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을밀대 냉면의 가장 큰 특징을 들자면 뭐니뭐니해도 살얼음 동동 뜬 시원한 육수를 빼놓을 수 없다. 원래 평양냉면 육수는 차게 식혀서 내는 것이지 살얼음이 뜰 정도로 얼리지는 않는 게 정석이었다. 그러나 을밀대는 육수를 한 김 식힌 후 냉동고에 보관해 살짝 얼린 뒤 손님상에 내놓는 방식을 도입했다. 사각사각한 살얼음이 뜬 육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시원함이 절로 느껴질 만큼, 보는 맛과 먹는 맛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맑고 차가운 육수가 면과 함께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청량한 풍미는 평양냉면을 보다 캐주얼하게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시켰고, 이는 훗날 을밀대가 두터운 마니아층뿐 아니라 젊은 층에게까지 사랑받는 요인이 되었다. 실제로 을밀대의 면발은 메밀가루와 전분을 배합해 굵고 투박하게 뽑아내어 메밀의 구수한 향과 맛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고, 육수는 소 사태와 양지머리, 사골, 야채를 푹 고아낸 뒤 차게 숙성시켜 감칠맛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그릇의 냉면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맛으로 대를 이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